뱀공주
모람
“미나미!”
“……아.”
왜 그렇게 멍해? 하루카가 바싹 다가와 묻자 미나미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양손을 흔들었지만, 하루카는 탐탁치 않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
“토우마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나야 뭐…”
토우마는 삐죽 솟아난 동물 귀를 후드로 가리며 말을 어물거렸다. 하얀 끈으로 얼기설기 땋아내린 빨간 머리카락은 한쪽 어깨를 타고 길게 내려왔다. 트인 어깨엔 상처 자국이 잔뜩이었고, 허리에 두른 가죽 치마엔 미처 빠지지 못한 핏자국이 군데군데 번들거렸다.
“…그게 천 년 묵은 네코마타일 줄은 몰랐지.”
네코마타 자체는 그렇게 흉포하고 강력한 요괴가 아니지만, 저만큼 오래 묵은 놈은 이름난 요괴에 준하는 힘을 가졌다. 네코마타는 흔한데다 어린 주술사들이 훈련할 적에 상대하는 약한 요괴였던지라,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방심하기 좋은 부류였다.
“요기 자체가 달랐잖아!”
하지만 하루카의 의견은 달랐다. 하나로 높게 묶은 청옥색 머리카락이 잔소리를 따라 팔랑였다.
“어떻게 그걸 몰라?!”
“너는 그쪽 감각이 유달리 좋잖…”
“하아~!? 그래서 잘 당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 그걸 감지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네. 잘못했습니다… 네코마타의 혼에 당해 고양이귀가 생겨버린 토우마의 몸에서 요괴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혼났답시고 아래로 축 늘어진 귀를 본 토라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뱀공주가 있으니 난이도 높네.”
“어머, 제 탓인가요?”
“탓까진 아니고.”
10여년 전, 야마타노오로치의 봉인이 풀렸다.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어 지옥도가 펼쳐지던 그 날, 온갖 주술사呪術師와 신령사神靈師들도 잡지 못한 대요괴는 어린 소녀의 손에 굴복했다. 그뿐이랴, 소녀는 야마타노오로치를 식신으로 삼아 ‘뱀공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널 먹고 싶어하는 요괴들이 좀 많아야지.”
토라오의 말대로였다. 어린 요妖술사의 고기를 먹기 위해 요괴들의 습격은 많았다. 하지만 전부 미나미의, 아니, 야마타노오로치의 먹이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귀한 요괴의 시체를 습득하게 된 토라오는 그의 곁을 따라다니며 장사를 시작했다.
“그래도 전처럼 많이 만나는 건 아니잖아.”
토우마의 볼을 양껏 늘리던 하루카가 툭 내뱉었다.
“여러분 덕분이에요.”
“미나, 몸은 좀 어때.”
방금도 엄청 크게 하품하던데. 토우마가 덧붙이자 미나미는 손등으로 제 입을 가렸다.
“…졸려요.”
아무리 강하다해도, 매번 오로치의 요력을 써가며 요괴를 잡기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미나미는 갈수록 피곤해했고, 멍해지는 시간도 늘었다. 그 때문에라도 현재 상태를 알기 위해 황실 신령사 ‘쿠죠’를 만나야 했다.
쿠죠 텐, 그는 지상에 있는 신령사 중 가장 아마테라스와 가까운 여자였다. 그의 가호를 받는 지역엔 요괴의 씨가 마른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요괴의 혼에 먹힌 일반인을 구제하고, 식신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술사들을 살리는 등 실제로 그가 남긴 업적이 뚜렷했기에 일행의 목적지는 그가 지내는 황궁이었다.
“이누마루 씨도 만나실거죠?”
“아무래도…”
천년이나 묵은 요괴한테 당했으니 답이 없었다. 이만한 저주를 해제할 수 있는 신령사는 그리 많지 않고, 찾아가기도 해매했으니 쿠죠 텐을 만나는 게 가장 빨랐다.
“왜, 그냥 그대로 다니지.”
“놀리지 마.”
토라오가 놀리듯 키득거리자 토우마는 뒤집어 쓴 후드를 꽉 눌렀다.
“그러고보니 너 그때 아무것도 안했잖아?!”
“아무것도 안하긴? 하루카가 도륙낸 걸 정리하느라 꽤 고생했다고.”
몸에 딱 달라붙는 하얀 천은 토라오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그의 손목엔 두꺼운 금색 팔찌가 걸려있었다. 천년 묵은 네코마타의 가죽과 이빨을 판 값으로 장만한 녀석이었다.
“그만하고 빨리 가자!”
미나미 기절할 것 같은데. 몸 여기저기에 부적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신구를 두르고 있던 미나미는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오른쪽 허벅지 아래로 길게 트인 치맛자락 사이로 새카만 뱀의 형상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전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업어줄까?”
“됐어요.”
토우마의 호의를 가볍게 거절한 미나미는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오로치와 함께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일까, 아니면 그를 배부르게 해주기 위해 흡수한 요괴가 지나치게 많아진 탓일까.
뭐가 어찌되었든, 제 수명이 그리 길게 남지 않았다는 건 직감할 수 있었다.